5월은 가정의 달이고 6월은 조국의 달입니다. 5월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면, 6월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기리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현충원이나 대전국립묘지, 또는 독립기념관도 좋은 선택지입니다. 더불어, 우리 근대사의 격전지였던 강화도에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선조들의 넋이 묻혀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6월 10일은 지금으로부터 143년 전, 미군의 침략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한 날입니다.
초지진의 소나무에 선명한 포탄 자국
강화도를 여행하면서 신미양요의 현장을 따라가면, 초지진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입니다. 초지진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처음 상륙한 장소로, 적의 공격을 막는 군사 요새입니다. 강화도는 예부터 외세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에 곳곳에 진을 설치했습니다.
1656년에 구축된 초지진은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군뿐 아니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군과도 격전을 벌인 장소였습니다. 초지진 앞의 소나무에는 지금도 포탄 자국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상기시킵니다. 미군이 대포를 끌고 이곳에 상륙한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5년 전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 것, 다른 하나는 조선과 통상 협정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후기에 빈번하게 출현한 '서양 오랑캐의 이양선'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이양선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목적으로 들어왔으나, 대부분 중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대포와 총칼로 통상을 강요했고, 여의치 않으면 약탈자로 변신하기도 했습니다.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올라온 제너럴 셔먼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평양서윤이 통상을 거부하자 강도가 되어 대포와 장총을 쏘며 금은과 인삼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평양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배를 불질러 침몰시켰습니다.
미군보다 먼저 침략한 프랑스,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배가 타 버렸을 뿐 아니라 선원들까지 전원 사망하여 미국은 철저한 응징과 배상을 받기 위해 두 번이나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막 끝났기 때문에 여유가 부족했습니다.
프랑스는 이를 틈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몇 달 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공격했고, 그 중 4척이 강화도에 상륙했습니다. 물론 이들도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해 프랑스 신부 9명이 불법 선교 혐의로 처형당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강화도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약탈이었습니다.
프랑스 군대의 약탈은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에 패배해 달아날 때까지 20여 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입니다. 이 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귀중한 서적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중 외규장각 도서들은 2011년에야 '영구 대여'라는 형식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초지진에서 약 5km 떨어진 정족산성은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최후 결전을 벌인 장소입니다. 조선의 관군이 목숨을 걸고 프랑스군을 물리친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소중한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군의 침공,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발생한 5년 후, 미군 함대 1,200명이 탑승한 5척의 군함이 상하이를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관군에게 맞이를 받았습니다. 조선은 이미 병인양요를 겪었기 때문에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개 속에서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 선발대는 조선 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는 초지진에서 4km 남쪽 광성보에서 일어났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직접 칼을 휘두르며 미군과 백병전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칼이 부러지자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선군은 전투에서 350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반면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번 전투는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광성진 관아 건물을 불태우고 초지진에 주둔했습니다. 이때 한반도에 첫 성조기가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곧 자진 철수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통상 요구에 여전히 침묵하고, 조선 병사들의 결사항전을 목격하며 전투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프랑스군과는 달리 민간인을 거의 약탈하지 않았습니다.
손돌목의 회오리 물결도 막지 못한 침략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던 광성보는 1976년에 복구되었습니다. 초지진과는 달리 여느 도성의 대문으로도 손색 없는 입구가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어재연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이곳을 최후의 결전 장소로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해안가 방어시설인 돈대가 나옵니다.
하지만, 수백 명의 조선 군사가 목숨을 걸고 외적을 막았던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해안 쪽으로 수백 미터 더 들어간 곳에 있는 또 하나의 돈대에서 처절한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손돌목돈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벌였던 울돌목이 떠오르는 이름입니다.
과연 손돌목도 강화도와 육지 사이, 물살이 빠른 바닷길을 가리키는 것인지요. 돈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지척인 육지 사이 곳곳에 회오리 물결이 보입니다. 이 물결도 미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결국 조선의 군인들은 최후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주검은 광성보 안에 묻혔습니다. 고종은 신미양요 2년 뒤 쌍충비를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쌍충비는 다행히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신미양요 투어 강화역사박물관
'신미양요 투어'는 초지진에서 시작해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마무리됩니다. 초지진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처음 상륙한 곳으로, 이곳이 적의 공격을 막는 군사 요새입니다. 강화도에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선조들의 넋이 묻혀 있기도 합니다. 미군의 침공, 신미양요를 겪은 초지진에서는 거의 실물 크기로 재현한 미군의 상륙 장면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됩니다.
초지진에서 약 5km 떨어진 정족산성은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최후 결전을 벌인 장소이며, 이곳에서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왕조실록이 보호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전시됩니다. 신미양요 투어는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마무리되며, 신미양요 당시의 모습을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병인양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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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1871년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했다. 1871년 4월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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