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과 연산군이 사림파를 제거한 1498년의 무오사화는, 무오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 사건은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이 때 김일손이 쓴 사초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일손은 춘추관에 활동했던 김종직의 제자였는데, 쓰던 사초에서 문제의 소지가 많은 기록을 자주 실었습니다.
이 중에서는 세조의 불륜 이야기와 단종의 시신을 바닷가에 버린다는 이야기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유자광은 이 사건을 주도하였습니다.
무오사화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정치 사건 중 하나로 이때의 연산군은 세조의 장남으로, 군과 함께 유자광은 신진사대부인으로 거듭난 이나규 등을 제거한 후 실록 청정을 신설하여 김일손 사초의 검증 작업을 시행하였습니다.
사초가 원인이 된 무오사화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됨으로써 무오사화는 사초와 관련된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사초는 조선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로, 조선의 한 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초에는 때로 실제와 상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초에 김일손은 문제의 소지가 많은 기록을 자주 실었는데, 그 중 위험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한 사초에는 세조가 후궁 권귀인을 불러 불륜을 시도했으나 권귀인이 거부했다는 증언과 함께, 윤씨라는 후궁과의 불륜을 암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소릉의 현덕왕후 유해를 바닷가에 버린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 승려 학조와 김종서가 왕궁을 조종하며, 왕족 부인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 중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와 군장사에서 사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 계유정난 당시, 황보숭과 김종서가 살해당한 것을 "황보와 김씨가 죽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 노산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렸는데,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시체를 묻는 사람이 없어서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물어뜯었다. 그러던 중 밤에 한 사람이 와서 시체를 가져갔는데, 이 사람이 시체를 어디에 던졌는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조의제문이라는 글은 김종직이 지은 초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지만,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게 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유자광 역할
무오사화는 조선시대 간신인 유자광이 이끌었던 사건으로, 1498년 음력 7월에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했습니다. 유자광은 조선시대의 다섯 왕을 섬겼던 '처세의 달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무오사화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유자광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자광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세조 9년(1447년) 출생이며, 이씨 팔자(李氏八字)는 공양(公揚) 이이(李彝)로부터 받았습니다. 신진사대부인인 이나규를 제거한 후 실록 청정을 신설하여 김일손 사초의 검증 작업을 시행하였습니다.
김종직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때마침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해 상의를 해오자 민첩하게 사건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김일손의 사초는 조선시대의 역사서로, 조선의 한 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초는 때로 실제와 상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초에 김일손은 문제의 소지가 많은 기록을 자주 실었는데, 이것이 유자광의 주도로 검증 작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때 실록 청정을 신설하여 김일손 사초의 검증 작업을 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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