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이 집권하고 4년 후, 연산군이 22살이 되었을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인해 사림파를 몰아낸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세조찬탈에 의해 공을 세훈받은 훈구파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국정에 전념하지 않고 사치와 향략에 빠지게 되어 이로 인해 갑자사화와 2년 뒤 중정반정이 일어나 집권한 지 12년 만에 퇴출되고 30살의 나이로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연산군이 국정을 위해 힘을 쏟았다면 세조찬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성종 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숙청을 당한 갑자사화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갑자사화와 그당시 연산군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로 인해 일어난 사건으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성종 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대부분 숙청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때 희생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종 반정 직후 복권됩니다.
연산군이 28살이었던 1504년 음력 3월 11일, 간택령이 떨어져서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귀달에게도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홍귀달은 이를 거부하면서 들여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글을 올립니다. 그러나 연산군이 분노하여 홍귀달을 교살합니다.
연산군은 갑자기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 이게 다 그 때 이세좌에게 제대로 벌을 안 줬기 때문이야!"라며 뜬금없이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전했습니다. 이세좌(1445~1504)를 물고 늘어져 이세좌를 유배 보내고 그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쳐서 유배를 보냈습니다.
또한 1504년 음력 3월 20일 밤, 연산군은 자신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끌고 와서 창경궁에서 두들겨 패고서 강제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귀인 정씨의 아들이며 자신의 이복 남동생인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을 잡아오게 시켰습니다.
연산군은 이항과 이봉이 창경궁으로 오자 주변인들을 모조리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이항 이봉 형제에게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가리키며 "죄가 매우 큰 여자들이니 몽둥이로 때리라"고 시켰습니다. 즉 자식들더러 자기 어머니를 때리라 시킨 것입니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두 형제에게 지금 연산이 때리라고 시킨 여자가 누군지 알려줄까봐 미리 자리를 옮기게 한 듯 합니다. 이항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때렸으나 이봉은 상황을 눈치채고 끝내 몽둥이를 들지 못했습니다. 이를 본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계속 몽둥이질을 하도록 지시해서 결국 두 귀인은 모두 그날 사망했습니다.
연산군의 무능과 세조찬탈
연산군은 부재 중에도 사치와 향략에 빠지면서 국정을 소홀히 다루어 군사 역량을 강화하려 하기보다는 효자 왕세자인 이종의 결혼 문제와 폐비의 복위 문제 등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연산군의 무능은 세조찬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세조찬탈은 세조대에 일어난 반정과정으로, 연산군 때부터 대왕이 되었던 세종대왕의 정치적 핵심이었던 훈구파와 세조대에 새로 등장한 세종의 사신들이 대치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의 대외안보와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세조대는 훈구파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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