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은 조선시대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고부접주입니다. 그는 1893년 고부 민란과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 총대장으로 활동하여 농민들의 권리와 힘을 대변하며, 불공정한 권력과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봉준의 목표는 조선 군민들이 함께 다스리는 '군민공치(君民共治)'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농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봉준은 조선 농민 운동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개화 정책의 시작
개화가 시작됨과 함께 조선의 겉모습은 변화했습니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1884년부터 1894년까지 10년 사이에 많은 개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들과 새로 수교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많은 사립 교육기관들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되었으며, 서울, 인천, 의주, 부산, 원산 등의 도시들을 잇는 전선이 개통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와 천주교를 믿는 것이 허용되어 서울 곳곳에 교회나 성당이 세워졌으며, 양옥집들도 많아졌습니다. 이 시기에 경복궁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화는 내정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이 이어져 백성들이 고통받았으며, 중앙으로 들어오는 세금이 중간에서 새면서 개화에 필요한 재정이 부족해졌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대표로 한 왕실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것보다 비자금을 마련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에만 몰두했습니다.
전봉준에 대하여
전봉준(1855~1895)은 고창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지방 향교에서 장의를 맡았습니다. 이를 보아 아마 몰락 양반 정도의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전봉준은 키가 작아 녹두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었으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약재를 팔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장성한 후에는 여러 고을을 떠돌다가 고부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논 세 마지기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으로 살았습니다. 훈장이 되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1890년 즈음, 전봉준은 동학을 접하게 됩니다. 동학은 교조 최제우가 체포된 이후 사그라들었다가 2대 교주 최시형의 활동으로 다시 교세가 살아나고 있던 차였습니다.
전봉준은 동학에 입교한 후 고부 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던 동학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또한, 인근 지역의 접주들인 김개남 (1853~1895), 손화중 (1861~1895) 등과 교류하며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1893년, 동학 신도들은 기독교와 천주교도 허용된 상황에서 동학 탄압을 멈추고 최제우를 신원시키자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력 행사를 위해 전국의 신도들을 모이게 하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충청북도 보은으로 경기, 충청, 전라, 경상 지역의 동학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보은 집회로, 그 전에 벌어졌던 공주 집회나 삼례 집회보다 훨씬 큰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보은 집회는 몇 달 만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조정에서 파견된 어윤중이 해산하라는 뜻을 밝혀 동학 지도부에서 선선히 받아들이고 흩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동학 안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봉준과 그 동료들이 주도한 이들은 훨씬 명확한 정치색을 띄고 강경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라도 금구에서 별도로 집회를 열고 있었는데, 보은 집회가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실망해 다른 방책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봉준이 사는 고부 지역의 농민들은 수령 조병갑 (1844~1911)의 수탈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탐관오리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인 조병갑은 만석보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게 한 다음 물세를 뜯어내거나 각종 죄명을 씌운 뒤 죄를 면해주는 조건으로 돈을 걷는 등 온갖 방법으로 수탈을 자행했습니다. 이에 참다 못한 고부 농민들은 항의하는 서신을 쓰고 관아에 내려 갔으나 오히려 매질을 당하고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도 조병갑에게 항의했다가 곤장을 맞고 죽게 됩니다.
전봉준과 봉기의 시작
1894년, 전봉준은 농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을 느껴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전봉준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 위해 전봉준과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습니다. 이 격문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목베어 죽이고 전주 감영을 함락한 뒤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철종 시절 전국을 뒤흔들었던 민란의 지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민군은 얼마동안 인근 고을의 호응이 없어 동요했지만, 손화중과 김개남이 연이어 봉기를 일으키자 백산에 집결한 후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동학이 주는 믿음과 분노로 농민군은 승승장구합니다. 태인, 부안, 정읍, 영광, 함평 일대를 점령해 나가고 관군과 처음으로 만난 황토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자신감을 얻고 세력과 힘을 불려가던 농민군은 그해 4월 전주 감영마저 차지하였습니다.
전봉준과 뜻을 같이하는 김좌진, 박영호 등의 지도자들은 전주에서 농민들을 만나 시위를 벌인 후 전주 감영을 차지한다. 이를 듣고 패닉 상태에 빠진 조정은 일본과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일본이 청나라와 맺었던 톈진조약에 따라 자신들도 군사를 보내겠다고 했다. 결국 조선에는 청군과 일본군 모두가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조정의 대처와 청일전쟁의 발발
그 때 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홍계훈의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무기의 성능과 군사력에서 우세한 관군은 전투를 우위 상황으로 이끌어갔습니다. 홍계훈은 농민군의 화의 제안을 뿌리치고 진압을 강행했으나,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에게 해산한다면 고종에게 시정 개혁안을 올려 시행되도록 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화의를 맺은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나오자 조정은 일본군에게 자국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청나라와 전쟁을 할 목적으로 왔던 일본은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경복궁을 공격해 점령한 후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봉기의 재개와 실패
김개남이 이끄는 군대와 손화중이 이끄는 군대는 각각 금산과 나주를 공격했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앞에 농민군은 역부족이었습니다. 패배를 이어가는 농민군은 결국 1894년 11월 27일, 전봉준이 해산을 결정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김개남과 손화중은 처형되었고, 동학 지도자들은 도주 생활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봉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개남은 청일전쟁이 계속되자 다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고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일본을 내쫓자는 목표를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개남은 전봉준에게 '척왜양창의'의 뜻을 알리자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김개남을 만나 그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김개남이 이끄는 군대와 손화중이 이끄는 군대는 각각 금산과 나주를 공격했지만 일본군과 관군 앞에서 역부족이 되어 패배하였습니다.
이에 김개남은 일본군과 전투해 죽게 되었습니다. 봉기는 실패로 끝나지만 농민들의 목소리는 크게 들려졌고, 시정 개혁이 하나하나 이루어졌습니다. 전봉준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결국 농민들은 자체적으로 고을을 통치하는 기구인 집강소를 이용해 지방에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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