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의 후손인 대무신왕이 698년에 건국한 국가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 위치했습니다. 발해는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발전했으며, 또한 일본과도 교류를 했습니다. 하지만 926년 고려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발해 유물을 중심으로 발해의 문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발해의 회화
발해 사람들이 그린 그림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단지 무덤 벽화만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발해의 대표 고분인 정효 공주묘에는 고구려식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는 생전에 공주를 모셨던 무사, 시위, 내시, 악사 등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식 화풍으로 그려졌습니다.
또한, 복두와 단령을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발해가 복식이나 건축 문화 등에서 당나라풍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벽화에서는 발해 악사들이 사용했던 악기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특별한 회화 기법을 사용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부식되지 않았습니다.
발해의 불교 유물
발해 사람들은 유학 경전을 즐겨 인용하고 국가에서 국립 교육을 실시했던 것에서 유교를 깊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교와 함께 불교도 발해 종교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발해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당나라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불교는 발해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했으며, 석인정, 석정소 등의 유명한 승려들도 배출했습니다. 절과 탑도 지어졌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찰은 하나도 없지만 상경, 중경, 동경 등을 중심으로 총 40여 곳의 절터가 확인되었습니다. 탑의 경우에도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영광탑 하나뿐이지만 상당수가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불상은 절과 탑에 비해 많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발해 이불병좌상, 관음보살입상, 함화 4년명 비상 등이 있습니다. 발해 불상만의 특징으로는 10cm 내외의 작은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 또 흙을 단단히 뭉쳐서 만든 전불탑佛이 많다는 점이 있습니다.
발해의 공예품
발해의 공예품 유물은 크게 금속, 기와, 토기, 석조 공예품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발해 토기는 고구려식 외에도 말갈의 것과 비슷한 양식이나 당나라풍 삼채 등도 있었습니다. 석조 공예품은 돌사자상이나 상경용천부 석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금속공예품의 경우에는 금제, 은제, 청동제 공예품이 다수 발굴되었습니다.
청동제 공예품으로는 청동 인물상이나 기마 인물상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고 금제 공예품으로는 금팔찌, 금비녀, 금제관식, 옥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금제관식은 세 갈래로 뻗어나간 모양을 하고 있어 고구려의 조우관과 비슷합니다.
발해의 건축
발해의 성은 1933년 상경성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만주, 북한, 연해주 곳곳에서 무수히 많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산성부터 평지성,보루, 차단성 등 다양했고 기능 또한 수도, 방어용, 주거용 등 다양한 갈래가 있었습니다. 규모도 크고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발해 성터로는 크라스키노 성, 남성자고성, 상경성, 온특혁부성이 지목됩니다.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와 같이 산성을 중시했지만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당나라의 것을 받아들여 평지성의 비중도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건물터로는 아까 언급한 절터, 관청 터, 궁궐 터, 거주지 등이 있었습니다. 상경용천부 터의 궁궐터를 보면 제법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 5개의 건물지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각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궁성 동쪽 부근에는 인공 연못과 산, 정자로 이루어진 '어화원'이라는 후원도 존재했습니다. 궁성, 관청 터, 절터를 제외하면 일반 백성들의 거주지 터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반지하식 유적이나 옥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온돌 유적도 있어 흥미를 유발합니다. 발해 건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발해 치미가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을 보면 건축양식이 엄청나게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해의 무덤양식
끝내기 전에 무덤 양식에 대해 말하자면, 정효공주묘를 중심으로 추측해서 고구려, 당나라 문화가 혼합된 양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은 벽돌로 쌓지만 천장은 돌로 막고, 한편으로는 천장 위에 석탑을 쌓은 특이한 형태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상으로 발해 문화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정리하면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기반으로 하되 당나라와 말갈의 것도 융합된 특이한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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