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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대동법을 확대 시행한 김육에 대하여

by 채유니후니 2023. 5. 16.

김육(金堉, 1580년 8월 23일 ~ 1658년 10월 1일)은 조선 후기에 유학자, 문신, 실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가, 철학자로 활동했으며,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했습니다. 대동법은 조선 중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대체한 세금 제도였으며, 지방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 거두었습니다. 산간지역 등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서는 삼베, 무명, 동전 등이 거두어졌습니다. 대동법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면서 국가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김육-사진
김육

김육의 가문

조선 중기는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시기였습니다. 이는 연이은 전쟁과 반란으로 인한 것입니다. 김육(1580~1658)은 조광조의 동료였으나 기묘사화 때 죽은 김식의 후손입니다. 이런 이유로 김육의 가문은 요직에서 머무르지 못했지만 사림의 학통을 계승하며 이어갔습니다. 김육은 1580년에 태어나 이이와 성혼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김상헌 형제를 비롯한 서인계 인물들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서인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자질이 뛰어났던 김육은 13세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의 손이나 배고픔 탓에 죽어나갔으며 조정의 무능한 대처로 더 큰 사태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어 아버지인 김흥우가 청풍 김씨 가문을 일으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육은 어린 시절에 이러한 시련들을 겪으면서 가세를 일으키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자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1604년에 급제했지만 당시에는 북인이 득세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서인으로서 조정에 나가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김육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골에 은거하였습니다.

 

의금부 도사 김육

이후 10여 년 간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삶과 가까워진 것도 이후의 행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서인 정권이 들어선 1623년, 김육은 북인 정권 아래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처지를 인정받아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과거에 다시 급제했을 때 벼슬에 당당히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인조의 신임

인조 시절에는 홍문관 부수찬, 이조 정랑,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으며 빼어난 일처리와 청렴함으로 인조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지방관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훌륭히 고을을 다스려 백성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습니다. 인조가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 아들들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을 때에 세자 시강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다른 신하들이 인조의 뜻에 영합하는 도중에도 원손들의 자질이 뛰어나다며 세자로 책봉할 것을 간하기도 했습니다.

삼도청장과 경제부사 김육

김육은 인조가 죽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삼도청장과 경제부사로 승진하였습니다. 그는 군역 및 업무 수행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대신부인 민씨와의 사이에서는 국사판례에 나타나는 법적인 문제들을 직접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성격은 권력의 남용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맹인 아내를 통해 독재적인 행태를 보인 김육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김육

그러나 김육은 그 후에도 조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이어가며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역사 서적인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역사근의'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종교,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며 조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김육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그의 업적은 그 후의 한국 문화와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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