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안위가 위협받는 긴급한 상황에서 백제는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새로운 수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인 웅진으로, 지리적으로 방어에 이점이 많아 지방 토착 세력의 영향력이 적다는 이유에서 선정된 곳입니다. 그러나 웅진에서 시작한 백제는 귀족들과의 갈등을 비롯한 심각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동성왕의 치세가 시작된 이후에야 나라가 간신히 안정될 수 있었고, 무령왕 대에는 고구려에 선제 공격을 펼쳐 마한 토착 세력을 완전히 품에 안을 정도로 중흥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무령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성왕.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의 왕권 강화 정책을 계속하고 중국 양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등 안정적인 치세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세력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전쟁시의 임시 수도에 가까운 웅진을 벗어나야 했습니다. 성왕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어 좁은 웅진 땅을 벗어나 더 넓은 곳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538년(성왕 16), 백제는 오늘날의 부여 일대인 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하였습니다.
부소산 자락에 축조된 산성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금강 남쪽의 곡류 옆, 부소산 자락에 축조된 산성입니다. 둘레는 2.2km이며 내부 면적은 98만 3900m²입니다. 축조된 시기에 대해서는 사비 천도 이전으로 추측됩니다. 이미 산봉우리에 작은 산성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가 사비 천도를 준비할 때에 도성과 함께 계획적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세월이 지나며 개축을 거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소산성의 성벽은 흙으로 주로 쌓아올려졌습니다.
성벽의 단면을 보면 어제 설명했던 백제식 판축 기법이 역시나 이용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소산성을 만든 백제인들은 흙으로 만든 판축을 정밀하게 올린 뒤 그 위에 3~5단 정도의 돌을 쌓고 흙으로 덮어 마무리했습니다. 성벽의 너비는 7m, 높이는 4m에서 5m 가량이며 성벽의 옆면을 비스듬한 경사면으로 해놓았습니다.
부소산성이 갖추고 있던 시설
현재 그 실체는 남아있지 않지만, 동서남북에 각각 뚫린 성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문에서는 대형 자물쇠가, 남문에서는 2개의 초석 기둥이 발견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외적으로 북문은 흔적마저도 없지만, 금강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내부의 경우에는 목책이 세워져 있던 자리, 군량미를 저장해놓던 저장소 터, 여러 누각 터, 거주지 등이 확인되어 백제시대에는 많은 사람이 주둔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이들 유적에서는 탄화미, 기와 등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방어용 성채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사비성 안에 따로 지어진 방어용 성채일 뿐이며, 실제로 '사비성'이라고 불린 것은 부소산성 일대의 더 넓은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부소산성 양옆을 뻗어가는 또 다른 성곽이 증명합니다. 이 성곽은 '부여 나성'이라고 하며 사비성의 바깥 성벽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적입니다. 참고로 나성은 2중, 3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안쪽의 내성을 감싸는 바깥의 성벽을 말합니다.
부여 나성은 백제의 판축 기법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각종 잡석을 섞어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외면에는 잘 다듬은 돌을 쌓은 형태입니다. 때문에 겉으로 보았을 때는 석성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현재 부여 나성 중에서는 동나성과 북나성이 남아있으며, 서나성과 남나성은 한때 백제시대에 있었다고 인정되었지만 현재는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 우세해 사적이 취소되었습니다.
성벽이 없는 부소산성
이 때문에 금강(백마강)을 바라보는 서쪽 방면은 성벽 없이 어떻게 방어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강 건너편의 부산성을 비롯해 여러 방어 시설을 구축해 놓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옵니다. 부여 나성을 바깥으로 한 사비성 내부에는 관북리 유적, 정림사지, 궁남지 등의 대규모 유적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관북리 유적은 큰 규모의 건물 터,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 배수로, 연못 터 등의 유적들이 확인되어 사비성의 왕궁이 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출토된 유물 또한 기와, 토기, 각종 장신구, 목재, 탄화미, 과일 씨앗 등으로 다양하고 가짓수도 많습니다. 유적 중에서도 특히 도로의 경우에는 20m 정도의 너비를 가져 마차, 수레 등의 운송 수단이 다니던 중요 도로로 보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질서정연하게 도로와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기에 사비성이 계획도시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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