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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신라의 삼국 통일 중심 김유신과 김춘추

by 채유니후니 2023. 5. 18.

신라의 삼국 통일 시, 두 인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 명이 김유신 장군입니다. 다른 한 명은 604년부터 661년까지 살았던 김춘추입니다. 김춘추는 신라 25대 임금 진지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추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입니다.

경주무령왕릉-사진
경주무령왕릉

2인자의 길을 걸었던 김춘추

보통 부모가 둘 다 성골이면 자식도 성골 계급을 이어받지만, 진지왕은 신하들에 의해 폐위된 임금이기에 아들인 용추는 진골 계급으로 격하되었습니다. 따라서 손자인 김춘추도 부모 중 한쪽이 진골이기 때문에 진골로 고정되었습니다.

 

김춘추는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던 신라 왕실의 원칙 때문에 왕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총명한 머리와 학식으로 이모인 선덕여왕의 굳건한 신임을 얻고, 왕좌에 대한 야심에서 한 발 물러 2인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골 귀족들에게 차별과 견제를 받던 김춘추는, 자신과 비슷한 가야 왕족 출신 배경 탓에 승진에 제약을 받던 김유신과 친해졌습니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하고,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의 딸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더욱 돈독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시각에서는 이상한 관계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근친혼이 횡행하여 그다지 놀라울 게 없는 일이었습니다.

 

딸과 사위의 사망으로 복수를 다짐한 김춘추

백제와 신라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642년, 백제군에 이끌리는 윤충이 신라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이로 인해 신라의 방어선이 뚫려버렸습니다. 이때 대야성주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이 사망하였으며, 이로 인해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방패 역할을 하며 전장에서 뛰어나게 활약한 김유신과는 달리, 무공이 없던 김춘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신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교력을 동원해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진흥왕 시절 이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고구려로 나아갔습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여전히 부담이 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동맹 제안을 고구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연개소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신라가 빼앗아간 한강 이북의 땅을 다시 돌려달라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김춘추는 당연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고구려의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김춘추는 청포 3백 보를 뇌물로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에게 별주부전 이야기를 듣고 살 방법을 깨닫고, 이후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거짓으로 땅을 돌려줄 것을 약속한 뒤 탈출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라와 고구려의 동맹 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647년이 지난 후, 김춘추와 김유신이 선덕여왕의 죽음 직전 일어난 비담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왕실의 법에 따라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습니다.

 

나당 동맹 형성과 신라 제도 정비

고구려와의 동맹 시도가 실패하자 김춘추는 중국의 당나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신라와 당나라는 모두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춘추가 당나라를 찾아갔을 때 당 태종 599~649이 김춘추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나당 동맹이 형성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진덕여왕 시기 김춘추는 외교 활동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많은 업적을 냈습니다. 당나라식 복식이나 지역명을 도입한 것은 사대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신라의 중앙 집권화에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된 정책이었고, 율령을 정비하거나 새로운 관제를 짜는 등 새로운 신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된 김춘추

654년,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신라 왕실에는 성골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최고 실세인 김춘추에게 이목이 쏠렸고, 신라의 왕족인 알천을 추대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화백 회의 결과 최종적으로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 아니 무열왕은 이제 백제와 고구려, 왜, 말갈의 공격까지 받게 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660년, 결국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백제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고 백제를 멸망시킨다는 오랜 숙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무열왕은 삼국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 사망했습니다. 그는 신라를 국가적 위기에서 삼국 통일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외세를 끌어들여 불완전한 통일을 이룬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당시에는 삼국 간의 동질 의식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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