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가족, 정말 다 죽였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역모사건에서 역적에 해당하는 사람의 3 족(族)을 다 죽이는 법이 있었습니다. 역적의 가족을 1 족부터 3 족까지 구분하여, 3 족에 해당하는 사람은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이러한 법에 따라 단종 복위사건 당시의 역적인 사육신 가족도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서 죽음을 당한 6명의 신하로써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 등이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사실이 끝이 아닙니다. 단종 복위사건 당시의 역적인 사육신 가족은 실제로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가족이 남긴 역사적인 흔적들이 깊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종 복위사건
당시의 역적인 사육신 가족 사육신 가족은 단종 복위사건 당시 세조와 중종, 인조 임금을 밀어 올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공신이 되었으며, 역적으로 판정이 나면 3 족에 해당하는 사람은 모두 죽여야 하는 법에 의해 사육신 가족 전체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족들은 역사적인 흔적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박팽년의 손자가 살아남은 이유
그러나 사육신 가족 중 유일하게 자손을 남긴 박팽년의 손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이유는 그가 엄마의 뱃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판결문에는 '출산 후에 뱃속의 자식이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보내라'라는 조항이 있었는데, 박팽년의 손자는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꽁꽁 숨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육신에 대한 평가의 변화
세조는 둘째 아들 성종 임금 때에 박팽년의 손자가 자신의 손자임을 자백하면서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후 박팽년의 손자는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아갔으며, 세조는 말년에 반성과 후회의 세월을 보내며 유명한 사찰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는 등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평가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이제는 이 가족의 역사적인 위치와 의미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사육신 사당 설립과 후원자 박팽년의 손자 중 한 사람인 순천박씨 박준규 씨는 고령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공화당 의장으로 있던 시절, 사육신 사당 설립과 후원자였습니다. 이후 국회의장까지 오른 박준규 씨의 생가 바로 뒤에 있는 순천박 씨 사육신 사당에는 박정희, 최규하, 정일권,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이후락 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 가족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사당
순천박씨 문중에서 세운 사육신 사당은 현재 경상북도 달성군에 있습니다. 그 외에도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사당도 유명합니다. 이 가족의 역사적인 흔적들은 깊이 남아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물 지위를 부여 받았던 숭례문과 흥인지문 (0) | 2023.05.10 |
---|---|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노비에서 재상이 된 반석평 (0) | 2023.05.10 |
개성 기생 황진이 이야기 (0) | 2023.05.10 |
역사적 지도자이자 애주가 세조 이야기 (0) | 2023.05.09 |
이순신 장군의 11가지 생활신조에서 얻는 교훈 (0) | 2023.05.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