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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거란의 1차 침입 고려 서희의 대처

by 채유니후니 2023. 5. 17.

거란족은 삼국 시대부터 요서 북쪽, 만주 서쪽에 자리를 잡은 유목 민족입니다. 907년 야율아보기요 태조가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울 때부터 거란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요하-중국 동북부(연운 16주)에 이르는 세력을 거느렸으며, 고려 시대에는 남쪽에 있는 중국 송나라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거란은 송나라를 점령하고 중국 전체를 먹으려는 적대적인 계획을 가졌지만, 송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있는 동쪽의 고려가 거슬렸습니다. 만약 송나라를 점령할 경우 고려가 후방에서 거란을 칠지 모른다는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란은 고려에 대해 화해 정책을 펼치고 회유했지만, 고려는 그들이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이는 등 강력한 거부의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거란은 993년 12월 고려에 침입했으며, 이것이 거란의 1차 침입입니다.

서희-흉상-사진
서희 흉상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 침입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은 무서운 속도로 압록강을 넘어 개경 코앞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한 신하인 서희[942~998]가 거란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거란과 협상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성종도 그의 주장에 귀기울이기 시작했고, 일부 신하들도 그의 주장에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안주시의 안융진이 거란군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해 승리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성종과 신하들은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서희에게 소손녕과의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서희와 소손녕의 대화는 처음부터 긴장이 느껴졌습니다.

 

소손녕은 자신이 대국 거란 황제의 대리인임을 강조하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서희는 서로 절하는 것이 없는 예절이라 거부했습니다. 소손녕은 서희의 대처를 감안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느꼈고, 서로 마주앉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소손녕은 한반도 북부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거란이 차지하고 있어 거란땅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은 국가임을 증명해 소손녕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또한, 서경을 제2의 수도로 두고 있음을 들어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음을 강조했습니다.

 

소손녕은 다시 "왜 너희 고려는 우리 거란과는 척을 지면서 송나라와는 친하게 지내고 있냐"는 질문으로 공격했습니다.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멸망시키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수교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송나라와의 관계 끊고 거란과 수교

결과적으로 거란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고려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려에 대한 거란족의 1차 침입 이후, 서희는 거란과의 대화를 통해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수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거란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고려는 전쟁을 막을 뿐만 아니라 땅도 얻는 일거양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희는 강동 6주 땅에 성들과 요새들을 세우고, 언젠가 다시 일어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고려는 건국 이래 첫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서희는 이후에도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여 고려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고려 현종 즉위 후 거란의 2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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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3차 침입 강감찬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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