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신라를 구해내며 결국 삼국 통일로 이끌었지만, 그의 둘째 아들인 김원술과는 죽을 때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김원술은 김유신과 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지소부인은 김유신과 돈독한 친구 사이였던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이었습니다.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가 무열왕의 왕비였기 때문에 김유신과 지소부인은 족보상으로 외삼촌과 조카 사이가 되었습니다. 김원술은 일찍이 화랑이 되어 원술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화랑은 불교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군사적 능력과 학문적 지식을 겸비한 인재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석문 전투에서의 참패
그리고 김원술은 672년 문무왕 12년에 일어난 석문 전투에서 비장으로 출전했습니다. 이때 김원술은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려 했지만, 담릉이 결정한 퇴각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나당 전쟁 초반에 황해도 지역에서 여러 차례 벌어진 전투 중 하나가 바로 석문 전투입니다.
신라군은 전투 초반에 당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하자 자신감에 부풀어 당군을 무리하게 추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역습을 맞고 석문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전투에서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목숨을 던지는 것이나 패배했을 시에 절조를 지켜야 했던 신라 사회에서는 김원술이 전장에서 살아남은 것이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웠습니다.
부모에게 인정 받지 못한 김유신 아들 김원술
그래서 김유신은 김원술이 살아남은 것을 부정하며 처형하라고 주청했습니다. 하지만 문무왕이 죄를 용서하면서 김원술은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김원술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투에서 싸우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에서는 전투에서 목숨을 던지는 것이나 패배했을 시에 절조를 지켜야 했는데, 김원술은 그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김유신은 김원술이 패배에서 살아남은 것을 부정하며 김원술을 처형하라고 주청했습니다. 하지만 문무왕이 죄를 용서하면서 김원술은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김원술은 김유신의 아들이었지만, 석문 전투에서의 퇴각 결정 등 자신이 남긴 공적을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인 지소부인은 김원술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 결국 김원술은 완전히 외면받게 되어 평생을 산속에서 벼슬 없이 살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전투에서의 숭고한 희생이 얼마나 중요시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김원술의 이야기는 불교사회에서의 출세와 전투에서의 숭고한 희생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김원술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문전투에 참전한 장수. 김유신(金庾信)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다. 신라는 668년(문무왕 8)에 고구려의 수도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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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통일을 이끈 김유신
김유신은 어렸을 때부터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리는 그의 화랑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화랑에서의 수련과 배움은 김유신에게 수련과 배움의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이 때 맺은 낭도들과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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