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철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조선 왕실은 후계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이미 차기 임금을 점찍어 둔 신정왕후[1808~1890]는 죽은 상태이며,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는 바로 12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을 후계자로 선정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고종은 인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먼 왕족이었습니다. 설명하자면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7대손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 남연군의 자식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이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이며, 조선 역사상 최초로 아들이 왕위에 있을 때 살아 있었던 대원군이라는 작위를 받아 우리에게 익숙한 흥선대원군[1820~1898]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애초에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에 오르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왕족 가운데 하나이지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세도 정치 때문에 날로 곪아가는 조선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구상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철종 말년 신정왕후와 접촉해 개혁 구상을 전달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 고종을 효명세자의 양자로 삼겠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선정왕후의 후원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주장에 동의하고 고종이 자신의 양자가 된다는 매력적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신정왕후는 이후 3년 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긴 했지만, 실제로도 흥선대원군의 후견인이자 든든한 개혁 파트너로서 그를 후원해 주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의 후원과 왕의 아버지라는 배경 덕분에 최고 권력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비변사 혁파와 의정부 건물 중건
조선 역사 500년 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개혁을 단호하게 해낸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에 세도 가문들에 의해 점령되어 모든 권력을 흡수하고 여러 폐단을 낳았던 비변사를 혁파했습니다.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본래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했던 의정부가 담당하는 부문을 늘리고 의정부 건물도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호포법 실시
또한 삼정의 문란도 없애고 군역 관련 문제는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징수하는 호포법을 실시함으로써 해결했습니다.
사창 설치
또한 환곡 관련 문제는 백성들이 자주적으로 빌리고 거둬들이는 사창을 전국적으로 설치하면서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수령의 수탈 방지
수령들의 수탈을 방지하고 민생을 위한 여러 조치를 펼치면서 백성들의 삶은 크게 개선되었고, 국가 재정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서원 철폐
무엇보다도 양반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서원 철폐였습니다. 서원은 원래 청소년들의 유학 교육 기관과 조상, 현인들을 모시는 제사 기관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양반들이 수령들과 결탁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소굴이 되거나 일부 권신들의 중심지가 되어서 여러 폐단을 낳았습니다.
결국 제대로 된 개혁을 위해서는 양반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서원을 폐지해야만 했고, 흥선대원군은 저돌적으로 접근한 끝에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 등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 노론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혁파한 뒤 1871년(고종 8) 주요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조선의 여러 폐단들을 갈아엎을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삶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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