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여행

경복궁 재건과 흥선대원군의 몰락

by 채유니후니 2023. 5. 7.

19세기말 조선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임금으로 삼고 사실상 모든 권한을 쥐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으며, 호포제, 사창 설치, 서원 철폐 등을 단호하게 추진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켰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개항 요구와 무력 충돌 등에 대해 개항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하면서 '왕권 강화'를 추구했습니다. 조선의 왕권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퇴색되어 있었으며, 그에 대한 대처는 필수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조선으로의 변화보다는 민생의 안정과 왕권 증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흥선대원군-사진
흥선대원군

경복궁 재건을 위한 재정 확보의 문제점

그가 이루기 위해 추진했던 것 중 하나는 경복궁 재건이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 중 하나로, 태조 시절 세워져 조선의 제1 정궁으로 대접받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로는 창덕궁, 창경궁 등이 복원되는 사이에서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경복궁이 재건되어야 왕실의 힘도 우뚝 설 것이라고 여겼고, 일찍이 1865년(고종 2)부터 경복궁을 중건하라는 명을 내린 뒤 공사를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복궁의 규모 자체가 지금 남아있는 것의 4배 정도는 될 만큼 엄청나게 큰 궁궐이었기에 재정이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원납전과 당백전

그래서 대원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원하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 재물을 바치는 원납전, 엽전 하나에 100냥의 가치를 지니는 당백전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원납전은 수령들이 강제로 바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백전은 당연하겠지만 가치가 떨어져서 많은 폐단을 낳았습니다.

백성의 원망

그러나 대원군은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공사를 진행했고, 1868년(고종 5) 대부분의 전각의 공사가 완료되어 왕실 사람들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이루는데 일조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모두가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 정책들은 백성들에게 원망을 자아냈고, 그의 아들인 고종의 불만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명성황후와 그의 가족들은 대원군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여 고종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최익현 등 보수적인 인물들을 통해 고종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반발을 이끌었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의 의미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당대 조선에 꼭 필요했으며 그가 있었기에 가능한 빛나는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책들이 백성들에게 원망을 새기며, 대원군의 아들 고종의 불만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성황후와 그의 가족들은 대원군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여 고종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반발을 이끌어내며 결국 대원군은 권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조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 경복궁

 

조선 왕조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 경복궁

궁궐은 역사적으로 왕권의 상징이자 나라의 중심으로 여겨졌습니다. 궁궐은 임금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이자, 나라 일을 보는 업무 공간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건축물로, 고대 그리스에서도 마찬

1.knue0604.com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인한 백성의 삶 개선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인한 백성의 삶 개선

1852년, 철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조선 왕실은 후계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이미 차기 임금을 점찍어 둔 신정왕후[1808~1890]는 죽은 상태이며,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효명

1.knue0604.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