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카파도키아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는 것을 보고, 한국 관광객을 만나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외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튀르크 상인들은 한국어 몇 마디는 할 줄 알았고, 일반 국민들도 한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전투병 파견
이것은 한국 전쟁 당시 튀르크가 한국을 돕기 위해 전투병을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약 1만 5천여 명의 튀르크 전투병이 전투를 벌이면서 1천여 명의 튀르크 전사자와 3천 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튀르크는 유엔군 중 가장 용맹하게 싸웠으며, 전투뿐 아니라 전후 한국을 위해 위급한 전시 상황에서도 한국의 교육과 고아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는 형제 국가로서 역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튀르크는 우리나라에 대해 형제 국가라고 부르며, 6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을 사랑해 왔습니다. 88 올림픽 때에는 “형제의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하면서 24시간 내내 TV 방송을 하기도 했고, 월드컵 등 국제 대회 때마다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당시 튀르크가 우리를 위해 싸워준 민족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으며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들의 짝사랑을 외면했고, 아니 그 실체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어서 튀르크 상인들은 한국어 몇 마디를 할 줄 알았고, 일반 국민들도 한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터키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과거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영양왕 18년 6 때 수 양제가 계민의 장막에 이동했을 때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습니다. 이때 계민은 돌궐의 계민 가한을 뜻하는데, 돌궐은 튀르크(Turk, Tūjué)의 음역으로서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튀르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수서』「양제본기 대업 3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돌아가 네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현하도록 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계민과 함께 공격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양제는 고구려와 튀르크의 통교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고구려 영양왕은 제위 9년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선제공격하고, 양제의 부친 문제의 30만 대군을 전멸시켰으므로 양제의 입조 요구는 허세였습니다. 양제는 몇 년 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되레 왕조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튀르크는 13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는데, 현재 터키의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를 투르크의 형제국이라고 설명합니다. 중국 북방의 유목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중국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펴왔던 고구려는 돌궐의 쇠퇴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흉노가 한나라에 망한 이후, 흉노족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몇 세기 뒤 로마제국을 약탈한 훈족(지금의 헝가리 일대)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진입 이후,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에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였습니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8-9세기에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였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습니다. 13세기의 마지막해 129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말에는 발칸반도까지 장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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