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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김정희

by 채유니후니 2023. 5. 14.

김정희는 조선 후기 세도 정치가 판치던 때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입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금석학 연구와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실학자이자 서화가로, 그의 서화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786년 (정조 10)에 태어나 1856년 (철종 7)에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은 지식 탐구와 예술 창작으로 가득했습니다.

김정희는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 완원 같은 청의 이름난 곳을 여행하며 금석학을 연구했습니다. 그의 깊은 이론적 고찰과 현장 조사로 이루어진 연구 방법은 현대학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정희-고택-사진
김정희 고택

70개가 넘는 호를 사용한 김정희

조선은 세도 정치가 판치던 시기에 있었으며, 정치부터 사회, 문화, 예술, 학문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김정희 (1786~1856)이 세상에 나와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김정희는 수많은 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호는 '추사', '완당', '예당', '시암', '과노', '농장인', '천축고선생' 등 무려 70개가 넘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한 명이 여러 개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김정희는 대부분의 작품에 서로 다른 칭호를 썼습니다. 이러한 호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지위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 출신으로 한때 홍봉한을 능가할 만한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유복한 유년시절의 김정호

그가 태어날 때에는 이미 김귀주, 김관주 등 일가 사람들이 척신 숙청 작업으로 쫓겨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기도 했기 때문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김정희는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철든 후에는 북학파의 대가인 박제가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 덕분에 청나라의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린 사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굴곡진 말년

1809년 과거에 급제한 후 꿈꿔왔던 연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배운 고증학은 실증적인 방법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는 고증학을 바탕으로 현실 문제와 철학적인 문제를 모두 다루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정희는 암행어사, 예조 참의, 검교, 대교, 세자시강원 보덕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효명세자와 돈독한 관계를 쌓았고, 이 덕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아비인 김노경과 김로가 크게 등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죽은 뒤에는 김노경의 득세가 끝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후에도 국사학, 고전학, 구비학, 시학, 음악학, 회화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김정희는 이처럼 자신이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공부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통해 굴곡진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학문적, 예술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의 업적은 조선 후기의 문화, 예술, 학문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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