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은 조선의 민간 외교가이자 어부였습니다. 생몰년을 비롯해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관직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없고 그의 출생에 대한 다른 언급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 평민 혹은 천민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안용복은 경상좌수영 부대로 들어가 노를 젓는 일 따위를 담당했던 그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습니다.
울릉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행동을 당시 조선 정부에 알렸고, 울릉도와 인접한 일본에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693년, 4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여느 때처럼 울릉도에 나가 어획을 하려던 안용복은 그곳에 있는 왜인 어부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한 이후 죽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섬에 사는 백성들은 태종 시절에 공도 정책을 펼쳐서 육지로 옮겨 살게 되었고, 이후로 울릉도는 무인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안용복은 동래 왜관에 머무르는 왜인들과 교류하며 일본어를 익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본의 두 어부가 울릉도를 발견하고 울릉도 지역을 독점하며 어업을 해 오던 안용복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안용복과 수하 박어둔을 일본으로 잡아갔습니다. 안용복은 곧 백기주에 다다랐지만 먼 타국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강변하였습니다. 오히려 울릉도와 자산도라고 불린 독도가 조선 고유의 영토라고 항의한 것이었습니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와의 담판 끝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일본 측의 국서를 받아내었고, 대마도를 통해 당당히 조선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마도 측의 대응은 강경했습니다. 안용복에게서 국서를 빼앗고 그를 잠시 가두었다가 조선으로 돌려보낸 뒤 그와 함께 일본으로 사신인 귤진중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귤진중은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며 조선이 포기한 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한 이후 죽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어 왔습니다. 주민들도 어업을 하며 제법 거주하던 울릉도는 태종 시절에 공도 정책을 펼쳐서 규모가 작은 섬에 사는 백성들은 육지로 옮겨 살게 했기 때문에 무인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 시절, 일본의 두 어부가 울릉도를 발견하였습니다.
울릉도에는 각종 자원이 많았기에 이 어부들은 막부의 독점 허가를 얻어 울릉도에서 전복, 물고기, 나무 등을 얻어 갔습니다. 이후로도 울릉도 지역을 독점하며 어업을 해 오던 그 후손들은 침입자로 보이는 조선 어부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안용복과 충돌하여 안용복을 일본으로 잡아갔습니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와의 담판 끝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일본 측의 국서를 받아내었습니다.
그 후 대마도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대마도 측은 일본의 독도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안용복의 국서를 빼앗고 그를 잠시 가두었다가 조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귤진중은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며 조선이 포기한 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충돌과 주장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문제입니다.
조선 조정의 주장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가 역사적으로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남인 정권이 실각하고 남구만 1629~1711을 영의정으로 삼는 서인(소론+노론) 정권이 집권해 있었습니다. 실권을 쥔 남구만은 귤진중이 막부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 저렇듯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라는 안용복의 주장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강경한 메시지가 담긴 국서를 일본 측에 보내도록 하는 동시에 삼척 첨사를 시켜 동해안을 방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조선 조정과 대마도 측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 문제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일본과 한국의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입니다. 안용복이 활약한 17세기 말부터 이 문제가 지속되고 있었는데, 조선 조정과 대마도 측은 이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이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안용복은 다시 한번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여겼습니다.
안용복의 행적
안용복은 1696년 봄, 승려 뇌헌의 배를 빌려 11명의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왜인 어부들이 이전처럼 울릉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고선 그들을 일갈해 내쫓았고 도망가는 왜인 일행을 쫓아 일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습니다. 안용복은 '울릉자산양도감세장'이라는 칭호와 깃발을 내세웠고 양반들이 타는 교자까지 타면서 당당히 호키슈로 향했습니다. 호키슈 태수를 만난 그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한편 에도에 있는 막부에게 대마도 측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상소를 올린 뒤 돌아왔습니다.
일본 막부에서는 대마도 도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명하는 동시에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침범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울릉도에 머물러 있던 왜인 어부들이 월경죄로 참수된 것은 덤이었습니다. 안용복 일행은 큰 공을 세운 뒤 기세등등하게 조선으로 귀국해 왔습니다. 그러나 안용복이 공도 정책을 위반하고 함부로 섬과 다른 나라를 오간 죄로 체포된 뒤 의금부로 압송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관직을 사칭한 죄까지 얹어져 중죄로 처리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울릉도와 독도 영토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오자 분위기가 반전되었습니다. 남구만을 비롯한 대다수의 신하들이 누구도 하지 못했을 일을 이룬 안용복에게 죄는 커녕 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월경죄와 관직 사칭죄가 중대한 죄목으로 여겨지던 당대에 벌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안용복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안용복의 이룬 업적
안용복이 이룬 업적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영토를 일본 대마도 측에게 인정받게 만들었으며, 그것도 일개 어부로서 이룬 일이었습니다. 그 어떤 외교관도 해내지 못한 외교적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정부는 울릉도가 아닌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영토라고 억지로 주장하고 있어,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리앙쿠르 암초, 다케시마가 아닌 독도의 이름은 우산국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이번 일은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일본의 영토로도 인식되는 지명문제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기사에서는 독도의 역사와 명칭에 대해 자세히 소개
1.knue0604.com
독도 팻말로 알 수 있는 한국 땅이라는 증거
독도 팻말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표시했던 최초의 시설물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47년 8월 20일, 독도의 동쪽 섬 동도에 세운 이 팻말에 오른쪽에는 ‘조선 울릉도 남면 독도’, 왼쪽에는 '울릉
1.knue0604.com
'역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악의 발굴이었지만 백제문화의 진수 무령왕릉 (0) | 2023.05.15 |
---|---|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신라의 궁성 (0) | 2023.05.15 |
누이 정순왕후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된 김귀주 (0) | 2023.05.14 |
정조를 지킨 1등 공신 경호실장 홍국영 (0) | 2023.05.14 |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의 생애와 활동 (0) | 2023.05.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