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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엇갈린 운명

by 채유니후니 2023. 5. 18.

수양대군은 아버지가 세자가 되기 이전에 태어났으며, 형제들과는 다르게 궁궐로 입궐한 시기가 늦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가 보낸 사저 생활이 길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정으로 자유분방한 성격과 무예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화-관상에서의-수양대군-사진
영화 '관상' 에서의 수양대군

수양대군 야심

그는 강궁을 다루는 등 힘이 세고 무예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문과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거나 <석보상절>을 한글로 짓는 등의 일을 했으며, 세종 말년에는 신하들을 대신해 왕의 명령을 직접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형 문종이나 동생 안평대군에 비해 미흡한 면이 있었기에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수양대군은 자신을 문무 양면에 모두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조선을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추운 겨울에 사냥을 나갈 때 가벼운 옷을 입어 자신의 강건함을 자랑하거나 일부러 늙은 말을 타고 착지하는 등 야심을 아버지에게 어필했었습니다.

2년 만에 사망한 문종

왕실에서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던 형 문종에 대한 아버지의 신임이 강했습니다. 반면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문예에 뛰어난 안평대군은 여러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또한 안평대군은 가야금 연주나 시적 재능을 보여줬으며, 형 수양대군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나 여러 서적들을 정리하는 일 등에서도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세종은 자식들 중 능력이 뛰어난 경우 크게 아끼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이 궁궐을 피로 물들이게 할 것이라는 상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1450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인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 문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말과 글을 표준화하는 업적을 세웠으며, 이어서 세종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과학 기술 발전과 문화 발전은 조선의 권위를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야심만만한 행보를 자주 보여 주던 수양대군은 조선 왕조 최초의 적장자 임금이라는 엄청난 정통성을 가진 문종 재위 시절에는 얌전한 처신으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문종이 2년 만에 사망하고 어린 아들 단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대립

김종서, 황보인 등의 정승들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게 되면서 왕자들을 비롯한 이들이 반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단종 초 정국은 김종서를 위시한 대신 세력과 수양대군 세력, 그리고 안평대군 세력이 미묘하게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이때, 수양대군은 대부분의 종친들의 지지를 얻고 있던 측근들과 함께 거사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단종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대신들은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 비해 덜 강경하다고 여기고 안평대군에 손을 내밀어 그 결과 다수파를 이룬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 비해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들에게 반발심을 가진 양녕대군, 계양군 등 대부분의 종친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궁궐의 수문장, 시녀, 내시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만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엇갈린 운영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이후, 수양대군 세력이 일으킨 계유정난은 하룻밤 만에 김종서와 그 세력으로 분류된 황보인, 조극관 등의 많은 인물들이 살해되었고 안평대군 또한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 뒤 사사되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까지 살펴보자면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반 강제로 양위한 뒤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성삼문, 하위지, 금성대군을 비롯한 이들까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이 두 인물은 비슷한 크기의 능력과 배포, 그리고 야심을 갖고 있는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만인지상의 임금이 되었고 한 명은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참 비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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