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여행

흥선대원군의 다양한 업적

by 채유니후니 2023. 5. 1.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와 국내 개혁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일부 유교 사림들과 명성황후와의 갈등과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척왜강경정책으로 서구 열강에 대항하였으나, 개항과 개화를 요구하는 일본과 결탁하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고종이 성인이 되어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자신의 손자 영선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업적은 조선 후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전제왕권의 재확립과 국내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세도정치와 일본과의 갈등에서는 타협과 협조를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반역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사진
흥선대원군

중앙집권 재확립 인재등용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당파나 신분과는 상관없이 능력 위주의 인재를 채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고, 탐관오리를 굴복시켰습니다. 이러한 인재 등용은 전통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재확립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 안동김씨들은 정치에서 천천히 사라졌습니다. 영의정 김좌근과 영중추부사 김흥근이 사직하고, 각 조판서를 역임한 척족들이 물러나면서 안동김씨들은 권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철회하면서 대원군은 국왕의 친정 구실로 확실한 실권을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인사권마저 갖게 되어 관리의 임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중간층 지식인들과 이서를 실무 담당자로 대치시키며, 정무정책 결정에 실질적으로 개입시켰습니다. 또한 소외되었던 남, 북인계의 인물들을 등용하였고, 고려 왕족의 후예들과 종친들을 대거 관료화시켰습니다.

대원군은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 통치 기구를 장악하여 통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자파세력의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재 등용상의 시대적 요청은 과거 제도를 개혁하여 보다 근대적이고 실제적인 통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관리 등용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조 체제 재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습니다.

삼정개혁

조선시대 대원군은 철종시기 삼정문란에서 발생한 민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조선은 경제적으로 토지를 기반으로 하므로 전정을 정비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전정수습책으로, 먼저 토지대장에 없는 땅을 조사하고, 토호들의 토지개혁을 금지하며 사점된 어장을 나라에 귀속시켰습니다. 그러나 사회인식 부족과 정치결함으로 인해 본질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회 발전과 농민의 사회생활 개선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해 한계점을 보였습니다.

호포제는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하여 징수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군역제 전면 폐기를 뜻하지는 않았지만 가중한 군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부역의 균형을 맞추면서 모든 신분층에게 세원을 부과하여 군정의 혼란을 제거하려는 시책이었습니다. 이는 양반유생의 계급적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 국고를 늘리게 했지만, 종래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내재적 발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삼정중에서 가장 문란한 환곡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했습니다. 대원군은 집권하면서 환곡을 정당히 운영하지 않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명령하고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환곡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만들어 불정을 방지하고자 했지만, 만연되는 불정이 갑자기 수정될 수 없었으며 국가재정과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환곡 자체를 폐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종 4년에 호조판서 금병학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창제를 실시했습니다. 의정부에서는 사창에 관인이 관장할 수 없도록 하고, 분급에 있어서 각 동은 대소 빈부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며, 전적으로 향촌민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회 구조적 모순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실행될 뿐이었습니다. 사창제 자체의 모순 때문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5도에 한정되었으며, 도내의 유망자에 대해서는 공동책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관계에 따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창제의 실시로 인해 환곡의 이익을 상실했던 귀족층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시도는 조선시대의 국가 발전을 위한 시도였으며, 그 이후에도 다양한 개혁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갑오개혁은 1894년에 일어난 개혁으로, 전통적인 봉건적 체제에 대한 비판과 유학자들의 혼란스러운 세력 싸움, 그리고 대한제국 탄생의 시기였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법제와 군대 조직 등의 혁신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국어 문화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토지개혁과 농민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후의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개혁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시도들도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사회적인 문제들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조선시대의 국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시도였으며, 현대 한국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서원철폐

대원군이 가장 과감한 개혁 중 하나인 서원철폐는 조대비의 교명을 이용하여 전국의 서원과 향사의 존폐 문제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서원과 향사를 비판하고, 우선적으로 사설과 감설을 엄금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사액서원에서는 전지나 노비 이외의 정액도 철저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서원은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안향을 기념하기 위해 백운동에 세우고, 젊은이들에게 유학을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특권을 부여하여 과거에 부합되는 유생의 집합장소로 전락시켰으며,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재화를 착취하였습니다. 또한, 군역을 기피한 백성들은 원노로 지망하게 만들어 범죄인들의 은신처가 되었습니다.

또한, 대원군은 유통 이라는 연판장을 이용하여 정치 여론을 조성하고, 국정을 비방하며, 당론에도 끼어들어 정치적,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원군은 집정초기부터 서원정리를 결심하고, 서원 중에서 가장 크게 물의를 빚고 있던 만동묘(송시열의 유지로 세워진 명의 신종, 의종을 모신 곳)를 철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전국의 유림들이 맹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대원군은 이에 강경하게 대처하였습니다.

이후,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로 인해 시간이 지연되다가, 고종 5년(1871)에는 8도에 명령을 내려 명현 1인이 2개 이상의 서원을 소유하고 있으면 1개만 남기도록 하였으며, 명현이라도 학문과 절의가 탁월하여 문조에 오른 인물에 한해서 1개소만 인정한다는 법령을 공포하여 전국의 서원 중 47개소를 제외한 600여개소를 철폐하였습니다.

세제와 재정의 대개혁

지난 예로부터 척족세도는 양반 지배 계급의 특권과 복지를 위해 국가 재정을 소비하고 백성을 착취해왔습니다. 즉, 양반들은 불로소득의 소작료로 안락한 삶을 추구하면서 세습․세록의 막대한 사유전을 인정받았으나, 세금은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과 상공업자들은 막대한 세금과 잡부금을 부과받아 민생을 타락시켰고, 결국 삼남반란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의 세수입과 공금 등을 횡령․착복하는 탐관오리들을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하고, 서울의 각 궁방과 수령방백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잡세와 잡부금도 일소시켰습니다. 또한, 비공식의 진상이며 사헌과 뇌물의 거래도 엄중히 단속하였습니다.

한편, 척족세도는 군포를 폐지하고 호포라는 균일세를 매호당 두 냥씩으로 제정하여 양반특권계급에게도 골고루 부과시켰습니다. 또한, 정보 상하의 관기를 확립하며 남용․낭비를 억제하고 근검․저축을 장려하여 국가재정의 충실을 도모했습니다.

경복궁의 중건

경복궁 대궐은 임진왜란 때 파괴된 이후 국가적 경제력이 부족하여 국왕들은 중건을 계획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국왕의 위엄을 회복시키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원한과 비판을 받았으나 대원군은 추호를 굽히지 않고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수백만명이 부역하며 약 8백만냥의 거액을 들여 지어 만 3년 후에 경복궁이 완공되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