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은 어린이날을 만든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일본 통치하에 있던 1922년에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하여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방정환은 어린이 문학가로도 활동하였으며,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습니다.
1920년대의 독립운동
운동의 불길이 잦아들며, 조선은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은 1920년대를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 속에서 노동자, 여성, 소작농 등 소외받던 계층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한 목소리가 커져간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이 소외계층들을 위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린이들은 그동안 어른의 종속품이나 하대하는 대상 정도로 여겨져왔습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학대를 받는 아이들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어린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
그러나 오늘 다룰 인물은 거의 처음으로 어린이들의 처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어린이날마다 항상 기억되며 모든 어린이들의 아버지라고 불려 마땅한 위인입니다.
이 위인은 소파 방정환(1899~1931)이다. 방정환 선생이 최초로 어린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며 어린이들의 희망을 주기 위한 취지에서 아동 인권 단체인 색동회를 세우고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일종의 경칭으로 쓰이는 '-이'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어린이를 이들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동안 아이들이 어린애, 얼라, 아니면 비하적인 의미를 담은 어린놈, 애새끼 등으로 불리는 것을 보고 느낀 안타까움에서 탄생한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방정환 선생과 그의 동료들은 강력한 탄압과 검열을 받으며 그들의 어린이 인권운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방정환 선생의 경력
방정환 선생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 이듬해에 미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에 졸업했습니다. 졸업한 해에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 형편 탓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른 나이에 일이라도 하기로 결심했는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들어갔으나, 곧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직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청년구락부라는 이름의 청년운동 단체를 조직하였고, 독립운동, 더 나아가 인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도요대학에 들어가서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관련 예술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17년 손용화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손병희로부터 많은 도움과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의 딸인 손용화와 결혼하게 됩니다.
결론
소외계층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던 1920년대, 이 시기에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어린이를 일종의 경칭으로 쓰이는 '-이'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어린이를 이들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며 색동회를 세우고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며 어린이들의 희망과 꿈을 위한 새로운 문화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검열과 강력한 탄압 등으로 그의 어린이 인권운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어느 때보다도 현재에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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