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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일본의 계략 갑오개혁의 중심 김홍집

by 채유니후니 2023. 6. 22.

일본은 19세기 말 조선의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갑작스럽게 급진개화파들을 부추기며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조선의 군사적 무력을 강화하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청군의 개입으로 조선은 결국 위안스카이를 파견한 청나라의 더욱 심한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홍집-사진
김홍집

일본의 계략 근대적 개혁의 추진

일본은 이후 청나라와 톈진 조약을 체결하는 등 최소한의 영향력을 남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1884년 이후 10년 동안 청나라가 가장 큰 지분을 갖는 것이었지만 많은 열강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묘한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4년 전봉준이 포문을 열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 내 일본인들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군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습격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자신들의 손 안에 넣었습니다. 고종을 협박해서 청군에게 조선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친서를 받아낸 일본은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이전부터 군사력을 강화해 오던 나라였기 때문에 성환 전투와 평양 전투에서 연이어 청군을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다시 들고 일어난 농민군 또한 싸그리 진압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조선 국민들의 여론이 매우 험악해질 것을 우려한 일본은 두 가지 방책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는 청나라에서 돌아왔지만 찬밥 신세가 되어 있던 흥선대원군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본격적인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갑오개혁을 실시하며 국가적인 규모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개화파의 거두 김홍집

김홍집(1842~1896)은 김영작의 아들로, 청년 시절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박규수를 따라 개화파의 거두로 이름을 떨치며 전 세계의 흐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8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사변가주서에 임명되었고, 1873년 복직해 훈련도감, 종사관, 흥양 현감, 호조 참의, 병조 참의, 공조 참의 등을 역임했습니다.

 

1880년에는 일본이 인천을 개항할 것을 비롯해 여러 요구를 해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정리하기 위해 제2차 수신사를 보냈고, 김홍집은 이 수신사를 이끌 적임자로 선택되었고 58명의 일행을 데리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청나라 사람 황쭌셴이 지은 《조선책략》과 같은 여러 책들을 조선에 소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책은 외교와 관련해서 조선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대하고 러시아를 멀리해야 한다는 등 청나라의 이 당시 정세관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김홍집은 일본 공사 하나부사와 의논해 인천을 개항하거나 새로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의 당상경리사로 임명되는 등 개화 정책에 앞장섰습니다.

 

갑오개혁 주도

갑오개혁은 조선시대 말기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개혁은 국가의 개혁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로,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제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와 김홍집 내각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김홍집은 군국기무처의 총재 겸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개혁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갑오개혁 이전, 조선은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적인 동요로 인해 국가가 고통받고 있었고, 국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의 안위를 책임지는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태만에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홍집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의 조직 개편과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은 조선 사회를 혁신의 길로 이끌었으며,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갑오개혁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개혁 정책으로는 국가 재정 일원화, 도량형 통일, 과거제 폐지, 과부 재혼 허용 등이 있습니다.

 

개혁과 국민들의 반발

이러한 개혁들은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위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또한, 국가 재정의 일원화와 신식화폐 발행 등의 재정 개혁은 국가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외세에 의한 강압적인 개혁이었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반발이 있었습니다. 노비제의 폐지와 천민 신분의 평등화 등 사회적인 변화는 당시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조선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으며, 그 결과로 조선은 국제 사회에서 더욱 존경받는 대한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단계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를 주도한 김홍집은 조선시대의 혁신을 이끈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조선 백성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농민군의 반란으로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의 진압 작전 아래 사그라들었고,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노우에 공사를 조선으로 파견했습니다. 박영효와 김홍집이 연립 내각을 내세웠고, 김홍집은 2차 김홍집 내각을 이끌며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박영효와의 내분으로 김홍집이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사건도 있었습니다.

 

청나라와의 사이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려 했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거를 반대하며 나섰고, 이 사건이 삼국 간섭으로 이어졌습니다. 박영효가 쫓겨나고 김홍집이 다시 총리대신으로 복귀했으며, 3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친미, 친러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습니다.

 

을미사변과 구타로 죽은 김홍집 

그러나 일본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명성황후를 끔찍하게 살해하는 무리수를 일으켜 3차 김홍집 내각이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에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김홍집은 외국 선교사들과 러시아 공사의 주도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체포되거나 일본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했습니다. 김홍집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체포된 후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구타되어 죽었습니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을 주도한 인물이었으나, 강경하게 개혁을 주도한 것이 실망을 가져온 이유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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