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 7 조약, 한일 병합 조약 등을 체결하여 주요 친일파와 매국노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입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체결, 고종황제 강제 퇴위, 정미 7 조약, 한일합방조약 등을 체결하여 주목받았으며, 그는 광본 전까지 여의도 면적의 7.7배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이완용
이완용은 1858년 이석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가난한 몰락 양반 가문에서는 어린 시절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0살 때 멀리 있는 일가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좋아졌습니다. 이호준은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청렴한 인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양자인 이완용은 상당히 순조롭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완용은 세자시강원에서 일하면서 세자였던 순종과 연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 연이 나쁜 쪽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참... 육영공원에 입사한 이후, 이완용은 영어를 습득하고 근대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청나라의 간섭 아래 미국과 교류하려는 고종의 의지에 부합하여, 1887년 왕명으로 주차미국참사관에 임명되어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미국에서 살던 시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친러파와 함께 '정동구락파'라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김홍집 내각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친일세력으로 분류되어 미국 공사관에서 피신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친일 내각의 압력에 처해져 위기에 빠졌습니다. 고종은 외국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왕의 안전을 위해 선교사들이 가져온 음식만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친왕파 인사들과 친미파, 친러파, 외국 공사들, 선교사들은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고종의 위기와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이완용
이들은 궁궐을 습격하려 했지만 군부대신 어윤중이 이들을 제압했습니다. 춘생문 사건이 끝난 후 이들 주동자들은 처벌을 받았으며, 이완용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요직을 거쳤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은 이 일을 통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게 고종을 빼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는 러시아 공사관과 고종 사이의 밀약 끝에 아관 파천이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세워졌습니다. 그 후 고종은 독립협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친미 인사들이 성장하자 친러 내각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그를 좌천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면서 여러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1898년에는 여러 이권을 서구 열강에 넘겨주었다는 이유로 독립협회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이완용은 밀려나며 독립협회에서 제명되었고, 이 과정 속에서 모종의 생각 변화를 거쳤습니다. 그때 국제 정세도 변하면서 일본의 세력이 러시아에 버금갈 만큼 거대해졌습니다.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체결의 결정적 역할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는 적극적인 영향력 행사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묘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습니다. 1904년, 이완용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나라에 파견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며 전권을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의 아래에 두라는 요구를 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였고, 친일파 대신들도 쉽사리 찬성을 표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이완용은 초안을 수정하면서 결정을 대신들의 논의에 맡기는 처신을 취해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고, 이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제 침략 시기에 이완용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을사조약 체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도 대한제국 내정을 일본에게 넘기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이완용은 일제와 가까워지면서 백작, 후작 작위와 저택, 재산 등을 받게 되었고, 일제의 합병과 관련된 경술국치 등 세 비극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백성들과 반일 세력으로부터는 최우선 저격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일제와의 관계 때문에 다른 친일파 대신들처럼 숱한 암살 시도를 겪었습니다. 이완용은 최악의 매국노라고 할 만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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