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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백제의 사비 천도와 웅진 천도

by 채유니후니 2023. 4. 28.

사비천도와 웅진천도는 백제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두 천도 사건은 백제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으로, 백제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비천도는 백제 성왕 때 일어난 천도 사건으로, 백제의 발전을 위해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사비(부여)로 천도를 단행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백제 성왕의 진취적인 정책과 백제의 발전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반면, 웅진천도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피살된 긴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그리고 백제가 직면한 군사적 위기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두 천도 사건은 백제 시대의 중요한 사건으로, 백제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역사의 발전과 성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비왕궁-사진
사비왕궁

성왕과 사비 천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 이후 문주왕과 동성왕이 살해되는 등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한 성왕은 538년 도읍을 사비로 이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했습니다. 성왕은 좁은 웅진에서 벗어나 넓은 평야를 가진 충청남도 부여로 천도해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습니다.

성왕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통치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성왕은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553년 신라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모두 잃은 백제는 정벌 대상을 신라로 돌렸습니다. 이후,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태자 부여창에게 신라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초기에는 우세했지만, 온 성왕이 신라 복병의 공격으로 전사하면서 대패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성왕은 전사했지만,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0여 년간 사비는 백제의 도읍이었습니다.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중심 산성으로 삼국사기에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백제의 웅진 천도

백제는 건국 이래 약 500년간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어 개로왕도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 제22대 문주왕이 즉위하였고,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길 위협에 처했습니다. 이에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남침 위협을 벗어나고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문주왕은 조미걸취, 목협만치 등의 신하들과 함께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으며,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웅진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나제 동맹

나제 동맹은 433년에 체결된 군사 동맹으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대한 위협으로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이 맺었습니다. 45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가 지원군을 보냈으며, 481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하자 백제가 신라를 도와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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